1940년대 당구여행(일본,중국)

생각해 보면 나의 당구수업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은 것 같다. 일부러 당구만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해외여행은 결과적으로 외국 당구장을 순방한 격이 됐고 외국무대를 돌아본 이 체험이 기량 향상의 알파 요소였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0년 동경 2천여개 당구장

첫 번째의 외국행은 혜화전문 2학년 때의 겨울방학을 이용한 동경 구경이었다. 지금은 머나먼 현해탄이지만 그 시절의 일본땅은 비교적 내왕이 자유로웠다. 보다 넓은 세계로 시야를 열어 주기 위한 가친의 배려가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게 만들었으나 1주일여의 동경 체재는 한마디로 ‘당구계 시찰’이었다. 이 당시 동경에는 약 2천여개의 당구구락부들이 그야말로 문전성시의 붐을 맞고 있었는데 그 중 20여개 이상을 순방했으니 나의 당구 광기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1940년대 일본의 당구장 분위기

일본 당구장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우선 깨끗함에 질렸으며 이런 청결함은 당연히 사교장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인 실력은 그다지 월등하지 않아 대개가 아마추어들로 그냥 즐기는 정도였다. 간혹 고점자들을 만나 대결도 해봤지만 나 같은 3백점대 실력자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실전에서 느낀 점은 우리 당구가 순전히 연습에 의한 경험 당구인데 반해 일본은 계산법에 의한 정석 당구로 특히 기본기가 충실한듯 싶었다.

이 학생시절에 겪은 일본당구계 견학은 두 가지의 멋진 성과가 있었다. 그  하나는 앞회에서 말한 일본의 당구명가 가츠라(桂) 일가와의 상봉이고 다른 하나는 쿠션 계산 책자의 입수다. 유명한 가츠라구락부는 당시 긴자(銀座3町目)에 위치했고 자매 중 동생인 노리꼬(典子)씨와 해후, 오래도록 친분이 이어졌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갓 30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니 실력도 실력이지만 섬세한 손길이 상아공을 겨냥할 때의 그 모습은 젊은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3쿠션 책자란 당시로서는 우리 당구인들에겐 매우 생소한 이름이었다. 당구에 관한 책자가 많이 나온 지금에도 이 책만은 역시 뛰어난 지침서였다. 하물며 그 시절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내용은 각 공의 위치에 따라 쿠션 포인트를 이용한 3쿠션치기의 꺾임 계산법인데, 한마디로 포인트 보는 법을 공식화시킨 해설집이었다. 당시 일본내 3쿠션 당구법의 최고봉 마쓰야마 긴레이(松山銀嶺)가 직접 쓴 이 역작은 현재까지도 당구기술서 중의 교본으로 3쿠션 수업자들에겐 가히 필독의 원전이다.

내가 이런 쿠션 계산책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3백점대에 올라 그간의 보통 크기 중대에 점점 싫증을 느끼고 충무로 쪽 일본인촌 구락부에 출입하고부터였다. 내가 그쪽의 대대에 익숙치 못해 쩔쩔매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정확한 각도로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였다. 연유를 알고 본즉 바로 이 전문서적을 통한 각도계산이었다. 온 장안을 헤매다시피 뒤졌으나 입수하질 못했고 동경에 닿자마자 최우선 선결과제로 책을 구입했던 것이다. 바둑도 그렇듯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연후에는 반드시 이론적 뒷받침이 병행되어야 다음 단계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있다.

평양 서문통당구장

이 일본행이 있고부터 틈나는 대로 국내 각지의 당구장도 여행삼아 찾아봤는데 남쪽보다는 이북이 저변인구나 기술면에서 보다 우위였었던 것 같다. 특히 평양, 북청, 함흥, 청진 등지가 각기 한바닥을 이루고 있었으며 3백점대 이상의 고점자도 많았다.

이 중 평양은 마치 안방을 드나들듯이 하루길로 나들이한 적도 많았으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창경원 벚꽃이 만발할 때쯤이면 모란봉 벚꽃도 꽃순을 열어 대략 1주일쯤 늦었다. 이 때부터 꽃길 따라 당구원정을 가면 현지의 서문통당구장이 주전무대였다. 실력을 떠나서 평양 젊은 패들의 호기(豪氣)로 봄밤이 온통 술에 젖곤 했었다.

중국(베이징) 당구 여행

두 번째의 외유인 북경행은 동경 때와는 달리 순전히 진학 목적의 여로였다. 이때가 내 나이 20살 되던 1943년 여름. 그 이전 혜화전문 3년을 졸업하자 선친은 일본 유학 대신 중국을 권했고 이에 따라 북경대학 문학부를 지망해 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행차였다.

서울을 하오 6시 반에 떠난 만주행 특급 희망호가 봉천(奉天)에 닿기는 이튿날 하오 4시 반. 기차가 멎자마자 그 길로 청엽구락부(당구장)에 직행한 것은 이곳에 선배당구인 박수복(朴守福)씨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경 때와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겨뤄 보고픈 젊은 패기가 작용한 중도하차였다. 아무튼 낯선 이역에서 평소 친숙했던 박선배를 만난 반가움이란 대단했고 3일간을 머물며 당구장과 술집 명소들을 찾아 쏘다녔다. 봉천 시내에는 약 50여개의 당구장이 있었으며 대다수가 일본인들의 경영이어서 시설이나 격조 모두 손색이 없었다.

한중일 당구 특징

그곳 당구고객의 국적 비율은 1할 정도가 중국인, 2할이 한국인이고 태반이 일본인들이었다. 게임을 관전하며 재미있게 느낀 것은 당구대 위의 제각기 다른 국민성이었다. 일본인은 쉬운 공부터 치되 섬세한 반면 스케일이 적어 모험성이 없었고, 한국인은 실속보다 과시 위주면서 사내답게 투기적인 당법이고, 중국인은 물론 실력도 뒤졌지만 지더라도 대국적으로 게임보다 분위기를 즐기는듯 싶었다.

출처: 빌리어드코리아

우리나라 최초의 당구장 무궁헌(1924년)

처음 궁궐내 어용놀이로서, 다음 일본인들의 사교구락부로 소개되기 시작한 당구대가 우리네 영업장으로 나타나기는 1924년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인텔리겐차 임정호(林政鎬)씨가 현 조흥은행 맞은편 광교통거리에 세운 「무궁헌(無窮軒)」당구장이었다.

이 한국 최초의 우리 당구장은 허름한 목조 건물 2층에 당구대 2대의 빈약한 시설이었지만 기품과 격조에선 그때까지의 일인 당구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 식민 압제하의 억눌린 민족감정은 무엇 하나 왜놈들에게 처질 수가 없었고 이런 경쟁의식은 일종의 반항 컴플렉스였다고도 하겠다.

우선 「무궁헌」이란 이름부터 나라꽃을 상징해 자주의식을 담았던 것이다. 실제 이 「무궁헌」당구장은 암암리에 학생운동 연락처로서 이용됐다. 이미 말했듯이 초창기 당구인은 거의 모두가 상류층의 젊은 엘리트들이었고 당시 엘리트라면 전문학생이나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이 당구장을 비밀 아지트로 삼게 됐음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구장은 위락시설인만큼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운데다 그만큼 당국의 감시도 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무궁헌」당구장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명사 중에는 윤치호, 유진오 두 분 선생도 끼어 있었다. 물론 당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곳에 나타나는 동창이나 선후배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사실이 들통나서 연락책이었던 김효근씨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약 2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맘때쯤 서울에만 국한돼 그 숫자도 한두 개를 헤아리던 순수 우리 당구장이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무궁헌」당구장이 개장된 지 1년 후인 1925년께부터였다. 주로 종로1, 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본거지를 이뤘는데 동아(2대) 중앙(4대) 테이라(1대) 등이 선두 그룹이었다.

특기할 사실은 포켓 당구대가 동아에 맨처음 설치돼 인기를 모았던 점이다. 차츰 상업당구장이 안착됨에 따라 고객층도 다양화를 보여 사각모의 최고 지식층 외에도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체 등 호상(豪商)들과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도 어울렸는데 이색 인물 중에는 이완용과 박영효의 손자도 끼어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두 귀공자는 실력도 만만치않아 1백 50점대의 고점자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구한말 역사에 오점을 찍은 장본인으로 이른바‘을사오적(乙巳五賊)’의 으뜸 인물이다. 그의 후손이라면 상당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만한데도 당자의 인품이 이를 용훼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고 오히려 그 세련된 매너가 주위의 선망을 샀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구가족 홍난파

이 초기 보급단계 우리 당구장을 즐겨 찾고 게임 품격을 높였던 선배 당구인들의 모습을 꼽아 보면, 우선 당구가족이었던 음악가 홍난파씨 일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난파 선생은 종로3가에서 바이얼린 강습소를 열고 있었고 그 옆에 종로당구장이 자리해 퇴근 후면 대포집을 찾기에 앞서 먼저 큐대부터 잡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고 한다. 선생의 당구 실력은 1백 20점(오늘날의 300점대)으로 적수가 흔치 않았다고. 그런데 친조카인 두 형제가 그에 못지않은 당구팬들이었다. 이분들은 모두 의사로서 형 홍재유씨는 안과, 동생 홍사유씨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그 이후 홍재유씨가 제천에 옮겨 감으로써 형제가 떨어졌으나 당시는 모두 종로통의 명문 개업의였다. 숙부인 홍난파선생을 필두로 형제분이 똑같이 당구에 심취해 그야말로 당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홍재유씨는 셋 중에서도 가장 열성파였던 것 같다. 얼마나 당구를 좋아했던지 아예 당구장에 살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간호원이 달려와 밀쳐내야만 마지못해 큐대를 놓았다고 한다.

원로 영화감독 안종화씨와 그 시대의 최고 스크린 액터 나운규씨도 빼지 못할 당구인으로 실력은 각각 60점(현 2백점)과 40점의 보통 수준이었다. 특히 나운규씨는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당구대에서도 시종 침묵 일색이어서 그와 한번 상대한 사람은 그 엄숙함에 질려 다시 어울리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저명 당구인과는 달리 순수 당구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고점자들로는 서정원·김효근씨 등이 있었고 이들의 점수는 3백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점이었다. 참고로 이때 국내 최고점자는 후쿠도쿠(福德) 무진회사 사원이던 일본인 다까끼(高木)로 그의 점수는 5백점이었다.

또 다른 고점자를 몇 사람 소개한다면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씨와 명월관 대표 이시우씨로 이들은 어떤 면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 당구 발전의 간접 지원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월등한 데서 이 고급 사교장의 재정적 후원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월관 대표 이시우씨의 당구 점수는 2백점대로 수준급 게임에는 으례 내기가 따르게 마련이고 이씨는 산해진미에다 기생까지 거느리고 보니 풍류한량들에게는 안성맞춤의 내기 상대였다. 여기에다 이씨 자신도 놀이판의 낭만이라면 녹록지 않은 품성이라 당구장 내의 그의 인기는 불문가지. 한판 승부에 명월관 파티로 이어졌음도 흔히 있는 일이었을 테니 그의 호방함이 이를 물리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기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간에 그는 이 선심 파티를 즐겨 감수했다는 얘기다.  

출처: 빌리어드코리아

베트남 당구 시장 규모

전국 당구장수 8000여개, 호치민에만 1,000여개…시간당 2,800~3,700원 韓25% 정도
4~6대 중소형 클럽 다수…20대 넘는 고급 대형클럽도 등장
한국식 ‘패자는 카운터로’문화…물과 음료수는 유료

위로는 중국에서 아래로는 남중국해까지 길게 뻗은 베트남은 북부는 수도 하노이시, 중부는 관광지로 유명한 다낭시, 남부는 베트남의 경제중심지 호치민시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이들 주요 도시마다 각각 문화와 유행의 흐름도 조금씩 다른데, 지역별로 선호하는 당구종목도 다르다. 북부에선 포켓볼, 남부에선 캐롬(1쿠션, 3쿠션)종목을 선호한다. 이 가운데 호치민은 베트남 캐롬의 허브역할을 하고 있다.

VBSF에 따르면 현재 호치민에서 영업중인 당구장은 1000여 곳. 베트남 전체 당구장(8000여곳)에 12.5%에 달하는 숫자다. 이 클럽들이 전문선수는 물론 아마추어 선수들의 연습장이자 일터로, 동호인들에겐 생활스포츠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등록선수는 100여명에 동호인수는 1만여명에 달한다.

당구장 1시간 2800원, 영화표 ‘절반’ 가격

베트남의 경제중심지 호치민의 풍경은 한국의 1980~90년대 도심지를 보는 듯하다. 시의 최대 번화가인 1군(Quận 1)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몰려 있지만, 1군을 조금만 벗어나면 1~2층의 상가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호치민 1군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인 빈탄(Bình Thạnh)군. 2층 이하 높이의 상가건물들이 왕복 2차선 대로변을 끼고 쭉 늘어섰다. 이 건물들 군데군데 당구장이 보인다.

호치민 당구장은 테이블 4~6대 규모의 소형 클럽들이 많다. 호치민 3쿠션월드컵 기간인 지난 달 21일, 기자가 방문한 ‘쩐 꾸엣 치엔 당구클럽’(이하 쩐 클럽)은 국제식 대대 6대가 놓였다. 호치민월드컵 우승자인 쩐 꾸엣 찌엔(세계 10위)이 2016년 ‘LGU대회’ 준우승 상금(3,000만원)을 투자해 지인과 공동운영하는 클럽이다.

클럽 입구엔 수십대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다. 당구장에 들어서자 자욱한 담배연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베트남에는 아직 당구장내 흡연이 허용된다. 선반위에 놓인 재떨이마다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흥미로운 점은 손님들이 3쿠션과 함께 1쿠션, 프리쿠션 등 다양한 캐롬종목을 즐긴다는 것이다. 프리쿠션은 일반 3쿠션과 동일한 방식이나, 수구 선택이 자유로운 캐롬종목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판, 스코어보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칠판이나 화이트보드에 수기로 점수를 적었다.

베트남의 유명선수인 마민깜(세계 19위)은 “베트남 선수들 중엔 쩐 꾸엣 찌엔, 응우옌 꾸억 응우옌(세계 14위) 등 일부 선수만이 개인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건물 임대료 등이 비싸 웬만한 선수들은 개인 당구장 개업을 꿈도못꾼다”면서 “(베트남 당구선수)대부분이 정부의 지원금이나 클럽 직원으로 일하며 돈을 받아 생활한다”고 설명했다.

쩐 선수는 “저는 좋은 기회를 통해 큰 돈(LGU대회 상금)을 얻어 이 클럽에 투자할 수 있었다”면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베트남에서도 당구가 인기 스포츠다. 특히 베트남에서 물가가 비싼 호치민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장시간 즐길만한 스포츠로 당구만한 것이 없다.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호치민 소재 당구장 이용료는 1시간 기준 6~8만동(한화 약 2800원~3700원) 수준. 쌀국수 한그릇 가격(4만동‧약 2000원)의 1.4배, 대형영화관 주말 영화표(13만동‧약 6,100원)의 절반 수준이다. 시간당 1만2,000원(평균)인 한국 당구시장에 비해서는 23~30%수준이다.

베트남 당구장에도 ‘대형화‧고급화’ 바람

지난 5월, ‘호치민3쿠션월드컵’ 현장에서 만난 응우옌 비엣 화 VBSF 국가대표팀 단장은 최근 베트남 당구인기가 상승중이며, 동시에 당구장 수도 증가추세에 있다고 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선 고급화 및 대형화를 표방한 클럽들도 속속 등장중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초(1월), 호치민시 10군(Quận 10)에 오픈한 ‘카우 락 보 빌리아드 336’(클럽 당구 336). 테이블 총 22대(캐롬 테이블 12대, 포켓테이블 10대)가 설치된 클럽이다.

기자가 클럽에 방문한 이날(5월 21일), 한산한 포켓볼 테이블과 달리 캐롬 테이블은 쉴 새 없이 손님들을 받았다. 이 클럽의 하루 평균 방문객은 100~150여명. 연령대는 20~60대로 다양한 편이지만, 30~40대 남성들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또한 클럽 이용객들의 90% 이상이 남성이다.

섭씨 36~38도를 오가는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손님들은 게임 중 수시로 수분을 섭취했다. 베트남 당구장에선 물과 음료수가 ‘공짜’가 아니다. 보통 음료수(330㎖)는 1만5,000동(약 700원), 생수(500㎖)는 1만동(약 470원)에 판매된다.

클럽 대표인 권 반 히유(30‧이하 권 대표)씨는 “음료 판매금이 클럽 매상에 꽤 큰 보탬이 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 당구장의 ‘짜장면 문화’를 설명했다. 그러자 권 대표는 배달음식을 먹고 있는 한 손님을 가리키며 “퍼(phở‧쌀국수)!”라고 답했다. 손님이 원하면 도시락 등을 배달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권씨는 ‘내기당구’에 대해선 “우리 가게에선 일체 금한다. 대신 진 사람이 게임비를 낸다”고 말했다. ‘패자는 카운터로’ 라는 암묵적인 룰이 베트남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

이어 그는 “베트남 당구 동호인들은 다른 지역에 훌륭한 시설을 갖춘 당구장이 있더라도 굳이 그곳을 가지않고 동네 클럽을 주로 이용한다”면서 “때문에 클럽이 몰려있는 지역에선 고객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호치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인 빈탄군 ‘바찌에우’(Ba Chieu) 시장. 저렴한 가격으로 현지인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소문난 ‘관광명소’다. 이 시장을 중심으로 3km 반경에 4개의 당구클럽이 영업 중이다. 이들 클럽들 중 ‘C&B 비다 바찌에우’(클럽 당구 바찌에우‧이하 바찌에우 클럽)가 고급화‧대형화를 표방해 크게 호황중이다.

1000㎡ 규모의 바찌에우 클럽 내부는 바(Bar)를 연상시킨다. 푸른색 조명이 내부를 비추고 있고, 바닥을 제외한 클럽 벽면들은 목재로 덥혀있다.

테이블 22대(중대 17대, 대대 5대)가 들어찬 클럽 중앙엔 미니 바(Bar)가 자리했다. 손님들에게 맥주와 칵테일 등을 제공한다. 전체적인 조명은 어둡지만, 공을 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천장에 설치한 커다란 조명들이 각 테이블들을 밝게 비추고 있다.

바찌에우 클럽의 손님들 중엔 직장인이 많은 편이다. 부동산중개업자인 호왕(33)씨는 “클럽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등이 소문이 나면서 빈탄군은 물론 호치민에서 가장 번화한 1군에서도 이 클럽을 찾아온다”고 말했다.

클럽 대표인 응우옌 탄 호왕(52)씨는 “시장 근방 4개 클럽이 가격, 서비스 등을 경쟁중인데, 이에 차별화를 두고자 5년 전 클럽을 오픈하면서 지금과 같은 인테리어로, 가격도 다른 구장보다 30% 저렴한 6만동(1시간 기준‧약 2800원)으로 책정했다”고 말했다.

출처: MK빌리어드뉴스 (2018.6.11)

당구 4구 경기 규칙

당구 4구의 기본적인 경기규칙 설명

당구대 공의 위치 스팟
당구대 위치별 용어 및 뱅킹 위치

뱅킹으로 선공을 누가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뱅킹에서 이긴 사람이 선택권을 가집니다. 뱅킹은 반드시 헤드스트링 위에 공을 놓고 쳐야합니다.

4구 초구 배치
4구 초구 배치

초구를 치는 사람은 흰공으로 쳐야합니다. 친선게임에서는 노란 공을 1의 위치에 놓았다가 선공인 사람이 초구를 친 후에 노란공 자리에 옮겨 놓은 후 시작합니다.

당구공 재배치 위치
당구공 재배치 위치

당구공이 당구대 밖으로 튀어나갔을 경우 공격권이 상대선수로 넘어가고 이때 튀어나간 공을 위 그림의 원칙에 의하여 재배치하고 게임을 진행합니다.

서현민 선수 (2021 PBA 챔피언)

2021년 1월 4일 밤 서울 메이필드호텔에서 열린 PBA투어 시즌 3차전 NH농협카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서현민(39·웰컴저축은행) 선수. 서현민은 이날 결승에서 서삼일(50)을 상대로 4-0(15-6, 15-12, 15-6, 15-11) 완승을 거두며 PBA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동안 우승 후보로 늘 주목받았지만 한 번도 정상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서현민 선수.

지난해 출범한 PBA투어에서 두 차례 기록한 5위가 자신의 최고 성적이었던 서현민은 잊지 못할 첫 우승과 함께 받은 상금 1억 원은 대출금을 갚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PBA에 집중하기 위해 충남 서천군에서 경기 남양주시로 이사한 그는 지난해 8월 서울 강북구에 생계를 위해 당구대 5개를 갖춘 소규모 당구장을 차렸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매달 300만 원가량 손실이 생기며 빚이 3억 원까지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서현민은 “2차 재난지원금 자격 조건도 되지 않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오픈하자마자 손실이 계속돼 힘든 나날이었다”며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이지만, 준비하면서 기다리면 내게 찾아온 우승처럼 다시 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당구장을 운영하시는 분들에게 응원을 전하고 싶고, 빨리 코로나가 끝나 당구장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당구장 영업이 어려워진 게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서현민은 “보통은 하루에 2, 3시간 개인 연습을 한 뒤 당구장 손님들과 게임을 쳐줬다. 하지만 손님이 줄어들면서 하루 6, 7시간 개인 훈련에만 집중했다”고 밝혔다.

2006년 당구 선수로 데뷔한 서현민은 대한당구연맹에서 활동하며 종합랭킹 10위 이내에 항상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데뷔 13년 때인 2018년에야 아마추어 무대에서 생애 첫 정상에 올랐을 만큼 오랜 세월 무관에 시달렸다. 당구계에서는 그런 서현민을 두고 “입상 경력이 많지만 이상하게 우승이 안 풀리는 선수”라고 평했다.

서현민은 “주변에서 항상 ‘우승 한 번은 해야 하지 않냐’ ‘우승을 왜 못 하냐’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며 “이번 대회에선 128강을 힘겹게 통과한 뒤 ‘나는 이미 죽은 거다. 편하게 치자’라는 마음을 먹었는데 그 뒤로 오히려 경기가 잘 풀렸다”고 말했다. (출처: 동아일보 2021.1.6)